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2011. 7. 10. 00:24

1.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1)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 사라예보 사건

① 배경 :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같은 슬라브 족인 세르비아가 이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② 사라예보 사건(1914) : 세르비아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

① 오스트리아의 선전 포고 :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즉각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자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② 전쟁의 확대 :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 포고하였으며, 프랑스,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하여 이탈리아를 제외한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양측은 모두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③ 불가리아와 투르크가 동맹국에 가담하고,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을 떠나 연합국으로 참전하였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과 일본, 중국이 참전하여 전쟁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2. 전쟁의 경과 

(1) 초기 주도권을 잡은 독일

① 초기의 전세 :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를 공격하여 승리한 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워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고자 하였다.

② 독일의 전략 실패 : 연합군의 신속한 대응과 반격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독일의 전략은 실패하였다.

(2) 장기전으로 돌입한 전쟁

① 독일은 어느 곳에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② 전쟁의 형태 : 전선에서의 전투에 그치지 않고 모든 국민의 총력전으로 전개되었다.

출처: http://iseeblue2.com.ne.kr/33.htm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배경

1. 1. 경제적 배경

1871년부터 본격화된 국가 간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경쟁자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 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 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 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 철도는 보스포러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 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 자본 투자로서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 간 각각의 이해 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하였고, 독일은 375마일(약 604킬로미터) 철도선 부설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다.

1. 2. 정치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자리 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大)세르비아주의, 프랑스의 복수 범게르만주의였다.

1. 2. 1.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이중 왕국에 반대하는 음모가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이 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 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 운동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그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1917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잡다한 인종 집단 간에 점증일로에 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압력에 직면하여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방대한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5000만 신민의 반도 안 되는 소수, 즉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의 마자르인만이 지배 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밖에 840만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500만의 폴란드인, 400만의 루데니아인, 550만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77만의 이탈리아인이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2] 그 가운데서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남부 발칸 지역에 분포한 슬라브족이 가장 강력한 발언을 했고 조직도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웃에 위치한 세르비아 왕국은 이들 슬라브인에게는 자기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옹호자이며 모범이었다. 6년 전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는 것을 세르비아가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할게 뻔했다. 그 후, 제국의 총참모부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게 되었고 이 보잘것없는 이웃 왕국을 당장 깨끗이 짓이겨 놓을 구실만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사라예보 사건)이 그런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 이것은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은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장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참모총장


그리하여, 황태자 암살에 직접 세르비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1. 2. 2. 기타

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 유럽의 모든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한 독일 제국을 주장하였다. 이 이념은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일의 팽창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 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그와 상반되는 지속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3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 영토 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 불편한 관계가 되면서 3제 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삼국 동맹(the Triple Alli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변화를 맞는다. 영국과는 1차 및 2차 지중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이익을 도모했지만, 요컨대 서로 이익을 놓고 타협하기 힘든 대립 구도의 열강을 억지로 화해시키고자 노력한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였다.비스마르크의 은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전통적인 남진 정책이 오스트리아와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빌헬름 2세 등장 이후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독일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까워졌다. 그 극적인 예가 프랑스의 군사 재정 지원이었다.또한 영국은 파쇼다 사건과 모로코 분쟁 이후 독일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대양 함대 건설을 놓고 건함 경쟁에 들어가면서 위기감은 올라갔다. 결국 영국은 기존의 고립 정책을 버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런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삼국 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 동맹과 3국 협상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상호 동맹에 소속된 국가 간에 전쟁이나 분쟁이 발발하면 다른 모든 강대국들이 자동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는 구조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씨 하나로도 큰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유지했다가 1915년 3국 협상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 포고하였다.


1. 3. 외교적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세르비아 왕국도 그 동맹국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외교적인 위기를 전쟁으로 몰고 갈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은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분할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영토를 누가 더 많이 자국의 세력권 안에 넣느냐 하는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도 영토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또한,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중요한 수로인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인 반도를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 했다.

러시아 제국은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을 때도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참패로 군사력이 약화된 터라 개입은 하지 못했었다.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러시아는 전략적인 이득 추구, 범슬라브 운동에 대한 동정, 숙적을 골탕 먹이고 싶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미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로부터 비슷한 지원을 다짐받고 있었다. 독일도 러시아와 같이 동맹국 지원에 나선 동기가 단순치 않았다. 유럽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무력에 대해 빌헬름 2세만큼 큰소리를 치는 군주는 없었다.그는 독일 제국이 완전히 지배하는 중부 유럽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국제적인 인정을 하루 빨리 받아내고 싶은 나머지, 그는 필요하다면 외국에서의 자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있었다. 인구는 25%, 자본력은 50%, 국민 소득은 100% 늘어났다. 강철 생산량은 대영 제국의 3배, 프랑스나 러시아의 4배가 되었다. 민족적 자신감이 팽배해진 독일 제국은 대영 제국을 넘보고 있었다.1870년 보불 전쟁에서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빼앗긴 사실을 잊지 못하는 프랑스는 인구가 독일 인구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며, 공업력과 군사력에서 점점 낙후해 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첫발을 내딛은 게 1892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인데, 독일이 군대 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같이 동원령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독일이 자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대영 제국은 독일로부터 절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으며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양국의 많은 귀족은 공통된 전통과 혈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이 해군력의 경쟁을 촉발하자 두려움을 갖고 대비하게 되었다. 사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식량과 원자재 공급을 자국 선박의 해로(海路) 확보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해로 확보와 유지는 필수였다.

출처: http://wapedia.mobi/ko/%EC%A0%9C1%EC%B0%A8_%EC%84%B8%EA%B3%84_%EB%8C%80%EC%A0%84


1. 제1차 세계대전 배경

▶ 2국동맹과 3국협상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은 유럽의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통일 독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무찌르고 독일 통일을 완성한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에게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으려 하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보복을 막기위해 1873년에 오스트리아.러시아와 3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둘러ㅓ싼 대립으로 동맹이 효력을 잃자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오스트리아와 함께 1882년 3국 동맹을 맺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 수상이 물러난 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꾀하였고, 서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 이른바 3B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팽창 정책은 주변 국가인 러시아와 프랑스를 긴장시켜 두 나라는 1894년 러.프 동맹을 맺었다. 한편, 영국은 세계 제일의 공업국으로 번영을 누렸으므로 다른 나라와 동맹할 필요가 없어 오랫동안 명예로운 고립을 지켰다. 그러나 독일의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독일의 세력이 영국의 세력권인 서아시아 지방까지 파고들자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어, 1904년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또 1907년에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 협상이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3국 동맹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3국 협상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의 국제 정세는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모로코 사건

1904년, 프랑스는 영국과 협상하여 탕헤르(모로코의 항구)의 국제 관리를 조건으로 영국으로부터 프랑스가 모로코에서 하는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1905년에 군함을 이끌고 탕헤르에 도착하였다. 그는 모로코의 독립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성언을 발표하는 동시에 프랑스에 항의하였다. 이것이 탕헤르 사건으로, 제1차 모로코 사건이라고도 한다. 1906년에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열강은 이 사건을 의논하였다. 이 회의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하게 지지함으로써 독일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을 깨뜨리는 동시에 식민지를 차지하는 데서 이익을 얻으려는 독일의 계획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1911년,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모로코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독일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또 군함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제2차 모로코 사건으로 양국 사이에는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국이 또다시 나서서 프랑스를 도와줌으로써 독일은 프랑스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콩고의 일부를 얻는 데 만족해야 하였으며, 또한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권을 인정해야 했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국제간의 긴장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 곳은 발칸 반도였다.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와 동진 정책을 추진하던 독일.오스트리아 등이 발칸 반도에서 맞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발칸 반도는 15세기 이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 19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스.세르비아.루마니아 등을 독립하였지만, 아직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일부 지역에서는 독립 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슬라브족과 게르만족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 있어 민족 간의 대립과 갈등도 심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유럽의 여러나라가 제각기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으므로, 발칸 반도는 언제 불을 뿜을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었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참패하여 극동 진출이 막히자, 다시 발칸 반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사는 슬라브 민족끼리 함께 뭉치려는 범 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한편, 독일의 후원을 받은 오스트리아는 범 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며 이에 맞섰다. 때마침 오스만 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나라 안이 혼란해지자, 이 틈을 타서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의 두 지방은 합쳐 버렸다. 그런데 이 두 지방은 일찍부터 이웃 나라인 세르비아 왕국이 탐을 낸 곳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의 처사는 세르비아 정부의 심한 분노를 샀다. 이리하여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고, 범슬라브주의와 범 게르만주의의 충돌로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출처: http://history.wonkwang.ac.kr/school/west/modern/modern12.htm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배경


경제적 배경

1871년부터 본격화된 국가들 사이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라이벌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트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 했다.베를린•바그다드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 철도의 부설은 보스포루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자본투자에 의해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간 각각의 이해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하였고, 독일은 375마일 철도선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정치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자리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세르비아주의, 프랑스의 복수 범게르만주의었다.오스트리아가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들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이중왕국에 반대하는 음모들이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가져온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이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운동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그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유럽의 모든 게르만족들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한 독일제국을 주장하였다. 이 이념은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일의 팽창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들,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그와 상반되는 지속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3제동맹(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영토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가지면서 3제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3국동맹(the Triple All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변화를 맞는다. 영국과는 1차 및 2차 지중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이익을 도모했지만, 요컨데 서로 이익을 놓고 타협하기 힘든 대립구도의 열강들을 억지로 화해시키고자 노력한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였다.비스마르크의 은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전통적인 남진정책이 오스트리아와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빌헬름 2세 등자 이후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독일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까워졌다. 그 극적인 예가 프랑스의 군사 재정 지원이었다.또한 영국은 파쇼다 사건과 모로코 분쟁 이후 독일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대양함대 건설을 놓고 건함 경쟁에 들어가면서 위기감은 올라갔다. 결국 영국은 기존의 고립정책을 버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런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3국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동맹과 3국협상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상호 동맹에 소속된 국가 간에 전쟁이나 분쟁이 발발하면 다른 모든 강대국들이 자동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는 구조가 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씨 하나로도 큰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때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유지했다가 1915년 삼국협상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하였다.

출처: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33qel

2전쟁의 원인 #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얻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어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그에 비해 신흥 강국 독일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화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차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국가인 영국, 프랑스의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전쟁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사건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한편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의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로 인한 발칸반도를 둘러싼 갈등도 전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발칸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이후 발칸반도의 각국은 영토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것은 세르비아로,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고 러시아가 독일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을 세르비아 비밀결사 '검은 손'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하는 사건으로 발전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여담으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냥 석방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예술적인 솜씨로 유지하던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삼각동맹체제를 빌헬름 2세가 폐기시켜버린 것이 독일의 결정적 실책으로 꼽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잘 구워삶아 삼각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노재상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를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프랑스와 연합하며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이에 따라 독일은 이러한 전략적 약점을 작전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먼저 프랑스를 치고 나중에 러시아를 손본다!"는 슐리펜 계획을 구상한다. 결국 슐리펜 계획 자체가 1차 대전 개전 원인의 일부가 됐으니 1차 세계대전 개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개전 과정의 막장스러움은 꽤 유명해서 외교사나 국제관계사에도 단골처럼 소개된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강경한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세르비아는 재판에 오스트리아 관리가 참가한다는 한 가지 조항을 빼고 이를 모두 승낙한다. 그러나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며 이에 따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독일에 전쟁을,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함에 따라 영국도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인척관계로 얽힌 참전국의 군주들은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산업화된 국가는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커졌다. 러시아는 애초 부분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부분동원령이라는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를 당연하게도 전면전의 시작으로 해석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의 발동을 명령하는데 계획이 발동되고 나서는 더 이상 수정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 2세가 "야, 벨기에는 중립이고 여기 터치하면 영국이 낀다는데 계획 수정할 수 없음?"이라고 참모총장 소몰트케에게 물어보니 "ㄴㄴ,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꽉 짜여져 있어서 벨기에 안 넘어가면 계획이 다 무너짐"이라고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벨기에를 지나가게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벨기에의 저항이 의외로 격심해 진격 시간표를 맞추기에 혈안이 된 독일군은 벨기에에서 최초로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 및 도시 파괴를 저지른다. 루뱅 시 학살사건이 유명하며, 당시 몇 백년 된 도서관도 같이 불타버렸다. 이 때문에 아직도 루뱅 시에서는 독일 깃발을 게양하지 못한다고... 이 외에도 많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및 이후 독가스 사용 등으로 독일군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고 이는 독일의 외교에도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된다. 

출처:

http://mirror.enha.kr/wiki/%ec%a0%9c1%ec%b0%a8%20%ec%84%b8%ea%b3%84%eb%8c%80%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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