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전쟁의 배경 및 원인
출처: 제1차 세계대전 – 젊은이를 위한 세계전쟁사, 최용성 저
이 대전은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을 포고하여 시작되었으며 1918년 11월 11일에 독일의 항복으로 종료되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이다.
전쟁의 배경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분할]
이 대전은 20세기 초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세계전쟁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나타난 제국주의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국,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여서 각 나라는 시장이 필요했다. 이에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식민지 확보 경쟁을 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다.
20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중국과 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 지배를 위해 일본과 러시아간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은 러시아와 영국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였다.
그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과거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다. 그 지역에서 영국과 신흥 독일이 대립하였다.
[3국협상, 3국동맹]
러/일전쟁 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모로코를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는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되어 서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독일이 극동으로 진출하는 것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여 1907년에 협상을 맺었다. 3국간의 협상체계는 그들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대립하여 프랑스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3국협상과 3국동맹간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이었다.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 국가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9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간의 대립이었다. 1898년 독일이 대함대 건설을 하면서 건함 경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그 후 1900년에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급성장하여 영국의 세력을 위협하자,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에 반대하여 1905년 3월에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독일은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영/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격화하였다. 또한 1911년 7월에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독일의 외교공세는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후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그래서 독일의 대외 진출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와 영국의 3C정책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은 대립하면서도 행동은 신중했다. 양국은 1908~1912년 동안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으로 타협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라, 협상 대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발발하였다.
[발칸 문제]
발칸지역은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였다. 1908년에 투르크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거주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러/일전쟁과 제1혁명(1905년)의 후유증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오스트리아의 배후의 독일과 충돌을 원하지 않아 세르비아를 지원하지 못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1912년에 세르비아/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후 그들은 투르크와 싸워(제 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다. 그러나 투르크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분배하는 문제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서 세르비아가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열강은 발칸지역에서 자국의 세력 확장을 위하여 소국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켰다.
전쟁의 원인
1914년 6월 28일에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으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워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그것이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 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개입되는 유럽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의 장애물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까지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선택한 것은 그들의 군비강화가 1914년 여름이 절정이었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1915년 또는 1916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의 대 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선전포고를 하고 30일에 총동원령을 선포하였다.
영국은 독일에게 23~27일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에 대하여 조정할 것을 요청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29일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31일에 독일은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총동원령의 철회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러시아로부터 회답이 없자, 8월 1일에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에 독일은 프랑스가 중립국가인 벨기에를 침범한 것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한 상태에서 스스로 북서 프랑스 공격을 위하여 벨기에를 침입하였다. 이에 영국은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이유로 다음날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어 일본이 연합국에 가담하였고 10월에 터키가 동맹군측에 참전하였다. 1915년 5월에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는 동맹을 배반하고 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하였고 대전 후반기에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유럽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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